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문단 편집) === [[6.25 전쟁]] === [youtube(ZAxV1GTmUrs)] [youtube(SweCXjbocWo)]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그는 [[중장]](Général de corps d'armée)으로 진급했다.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Guerre de Corée)이 발발하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었던 [[프랑스]]는 [[영국]], [[터키]],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1950년 7월 22일 [[유엔군사령부|유엔군]]에 참여할 것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그것은 정치적 제스처일 뿐이었다. 영국과 터키가 각각 1개 여단의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한 것과 달리 프랑스는 NATO군 가입과 [[베트남 전쟁|인도차이나 전쟁]] 등을 명분으로 전투부대를 파병하지 않고, 고위급 [[장교]]가 포함된 10여 명의 사찰단을 구성하는데 그쳤다. 프랑스의 이런 무성의한 태도에 [[미국]] 정부는 프랑스군 시찰단이 [[극동]]지역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일본]]을 벗어나지 않게 할 것임을 프랑스 정부에 통고하면서 프랑스 정부의 기만적인 행위에 실망을 표명했다. 미국 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좀 더 많은 [[유엔]] 회원국의 전투부대가 미국 측에 동참해 [[6.25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이 전쟁이 단순히 '미국 대 [[소련]]' 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유세계 대 공산세계 간의 전쟁'''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가 지상군 참전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치, 외교적으로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프랑스는 정치, 외교적 명분상 같은 상임이사국이었던 영국과 비슷한 규모의 파병 압박을 받았고, 많은 시민과 군인들이 실질적인 [[군대]] 파견을 요구했는데, 프랑스 육군참모총장인 블랑 장군과 제2차 세계대전 나르비크 전투의 [[전쟁 영웅]]으로서 당시 외인부대 감독관[* 명칭은 감독관이지만, 사실상 외인부대 사령관이라고 보면 된다.]으로 근무하고 있던 몽클라르 장군 등이 군대 파견을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파견 결정권을 쥐고 있던 프랑스 국방차관 막스 르젠은 위의 몇 가지 사정 때문에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에 블랑 장군과 몽클라르 장군이 그를 설득하고 나섰다. 블랑 장군은 "기존 부대와 관계가 없는 특별부대를 창설하고, [[현역]] 및 [[예비군|예비역]]에서 지원병을 받아 [[미군]] [[보병]][[대대]] 형태로 구성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르젠 차관은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단시일 내에 창설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면서 거절했다. 이에 블랑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 중에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선발한다면 가능하다"고 말했고, 몽클라르 장군도 이에 덧붙여 "만약 부대가 창설되면 제가 그 부대의 대장직을 맡겠습니다"라며 르젠 차관의 결심을 촉구했는데, 이 말에 르젠 차관은 몽클라르 장군에게 "내가 알기로는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관인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몽클라르 장군은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 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에드완 베르고, <6·25전란의 프랑스대대>, 동아일보, 1983, 40페이지] 그 결과 르젠 차관도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그를 UN 프랑스군 사령관 겸 UN프랑스 대대의 행정 대대장에 임명했다. 작전대대장은 르 미르 소령이었다. 이로써 몽클라르 중장은 유엔군 프랑스 대대의 초대 행정대대장[* 재임기간: [[1950년]] [[11월 29일]] ~ [[1951년]] [[11월 30일]]. 일반적인 계급 강등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대장]]에 격을 맞추기 위해 처음 몇 달간 계급장만 [[중령]] 계급장을 달았다가 나중에는 원래대로 중장 계급장을 달았다.]을 역임하게 되었다. 대대장 몽클라르 중장은 처음 몇달간은 직책에 맞춰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유엔군의 다른 지휘관들은 여전히 그를 중장으로 대우해주었고, 결국은 원래대로 중장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몽클라르는 당시 [[미8군]]사령관이던 [[매튜 B. 리지웨이]] 중장과 군 경력도 비슷했다. 그는 행정 대대장이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낮은 계급인 상급부대 미군 지휘관들의 명령은 받지 않았고, 군수 행정 관련 회의에는 참석해서 미군 지휘관들과 얼굴을 맞대고 여러 부탁을 해야 했다. 다른 대대와 공평하게 보급품을 분배하려는 미군 군수장교들은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프랑스군 '''[[중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큰 곤란을 겪었다.[* 제아무리 동맹국 출신 아저씨라지만 [[영관급 장교|영관급]], 잘해야 [[준장]]들로 구성된 회의에 '''[[중장|3성 장군]]이 찾아와 부탁'''을 한다면 거절하기 매우 난감하다. 이 중장 아저씨의 부탁을 잘못 거절했다 [[제2차 세계 대전|다른 전쟁]] 때 자기와 같이 싸운 (현) 직속상관 귀에 들어갔다가는([[내리갈굼|...]]) [[이하생략]].] 미군에게 전투 명령을 받는건 작전대대장 르 미르 소령이었고, 르 미르 소령은 포탄이 난무하는 최일선에서 부대를 진두지휘했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에 도착한 후 [[미 육군]] [[제2보병사단(미국)|제2보병사단]] 23연대 휘하로 들어갔다. 1951년 2월 13일에서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미 육군 제23연대와 중공군 제39군 사이에 벌어졌던 [[지평리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는 [[총검 돌격]]까지 해가면서 혈투를 벌인 끝에 전투에 승리했다. 지평리 전투는 1950년 10월 중공군이 참전한 이래 처음으로 중공군의 공세가 저지된 중대 전환점이었다. 몽클라르 중장은 1951년 3월 3일~8월 24일 사이에 UN 프랑스 대대의 군수지원 문제와 병력교대 문제 해결을 위해 프랑스로 일시 귀국했다. 이후 1951년 11월 28일 1년간의 한국 파병을 마치고 다시 출국하여, 일본에서 요양을 거쳐 1951년 12월 18일 프랑스에 귀국했다. 1951년 12월 28일에는 UN 프랑스 대대 파병 1진이 1년의 파병기간을 채우고 파병 2진과 교대하여 프랑스에 귀국했다. 몽클라르 중장은 1952년 5월 29일 프랑스 육군 중장으로 정년 퇴역했다. 여담으로, 한국에 왔을 때 한국인 [[당번병]]을 배속받았다.[* 미군에 배속된 [[카투사]]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영국군이나 프랑스군 등 다른 외국군에도 똑같은 목적으로 한국인 병력이 배속되었었다.] 몽클라르와 의사소통이 잘 될 거라는 사전 통보와는 달리, 정작 그 '''신학생''' 출신 당번병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몽클라르와 한국인 당번병은 '''[[라틴어]]'''로 서로 대화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